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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말] 상평(上平)

editor752 2020. 6. 3. 11:35

말은 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라

=사람의 새끼는 서울로 보내고 마소 새끼는 시골[제주]로 보내라

사람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소위 큰물인 수도(서울)에서 살아야 한다는 취지의 말이다. 이런 경험칙은 이미 다산이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확인이 되니 사회적인 성공과 관련해서는 꽤 오래되고 보편적인 관념일 듯하다.

이 속담과 관련이 있는 단어가 있으니 바로 상경(上京)이다. 지방에서 서울로 이동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때 '서울'은 京에 대응하는 것으로 지금의 지명 서울(Seoul)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서울'은 한 나라의 수도란 뜻으로도 쓰이는 것이다. 즉 신라의 '서울'은 경주이며, 고구려의 수도는 '평양'인 것이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남한의 수도인 '서울'이 어휘에 남아있는 것이 마땅치 않았던 모양이다. 북한의 대사전인 <<조선말대사전>>(증보판 2006)에 '상평'이란 단어가 새롭게 등재되었다.

상평1 (上平) [명]
우로 올라간다는 뜻으로 《평양으로 가는것》을 이르는 말.

참 흥미로운 단어가 아닐 수 없다. '상경'의 서울 경이 어지간히도 눈에 거슬렸던 모양이다. 북한에서도 수도로 가는 것이란 뜻 '상경'을 쓰고 있음에도 '상평'이란 단어를 만들어 쓴 것이다. 물론 정책적인 신어일 수도 있으나 최근에 만들어진 말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아무러면 답장 한 장도 없이 그럴 법이 있느냐? 아주 너에게는 적당한 혼처가 났으니 페론하고 상평해서 토의하자.

북의 소설 <<새 현실 속으로>>의 용례이다. 소설가 리춘영의 작품으로 1957년에 출간되었는데 이 작품에서 '상평하다'가 쓰이고 있다.

자네도 이젠 알맞는 일거리를 찾아야겠는데… 상평한지도 퍼그나 돼서 갑갑하겠군그래.

최근(2014년)에 출판된 윤정길의 <의리의 전역>라는 작품에서도 '상평하다'의 용례를 확인할 수 있다. 용례의 시기별 분포를 보면, 분단의 초기에 사용되기 시작하여 현재까지 쓰이고 있음을 확인할 수 단어치고는 사전 등재가 늦은 편이라 하겠다.

상평1 (上平) [명]
우로 올라간다는 뜻으로 《평양으로 가는것》을 이르는 말.

상평하다 [동](자)
례문: 딴데루 가려는걸 알구 저두 부랴부랴 상평해서 아들자식을 불러앉혀놓구 대판 욕을 해주었습니다. (장편소설 《삶의 향로》)

북한에서도 '상경'이 쓰이고 있음에도 이 '서울 京'이 남한 수도인 '서울'과 겹치는 것이 눈에 걸려 다른 말로 대체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북한의 수도는 평양(平壤)이니 수도로 가는 거라면 京이 아니라 平이어야 체제 내적 모순이 발생하지 않았서였을까? 그 저간의 사정을 정확하게 알아낼 수는 없다. 그러나 분단이라는 상황이 이 단어의 생성과 사용에 주된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점은 경험직으로 감지할 수 있다.

그렇다고 '상평'을 최근에 정책적으로 만들어진 신어라고 보기는 어렵다. 우리에게 생경하고 <<조선만대사전>>(증보)에서야 등재되기는 했으나 최근에 쓰이기 시작한 단어는 아니다. 복합어 <상평하다>로 그 용례를 검토해 보자.

아무러면 답장 한 장도 없이 그럴 법이 있느냐? 아주 너에게는 적당한 혼처가 났으니 페론하고 상평해서 토의하자.

위 용례는 리춘영의 <새현실속에서>(1957)의 한 구절이다. 출판연도가 1957년이라는 점에서 보면 '상평'은 분단 초기부터 사용되기 시작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여러 작품에서 용례가 확인되는데 그중에 최학수의 <큰심장>(1967)에서도 아래와 같은 용례를 확인할 수 있다.

상평하는 걸음에 다른 도의 실정을 잠간이나마 보아야 하겠다고 작정하신 그이였다.

그리고 아래와 같이 최근에 출판된 윤정길의 <의리의 전역>(2014)에서도 <상평하다>가 쓰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자네도 이젠 알맞는 일거리를 찾아야겠는데… 상평한지도 퍼그나 돼서 갑갑하겠군그래.

단지 세 개의 용례만으로 일반적인 결론을 내기는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상평하다>가 50년대부터 쓰이기 시작해 지금까지 쓰이는 단어라는 점은 분명히 알 수 있다.

남북의 언어차이는 언어 정책에서의 규범의 차이, 어휘 면에서는 체제 차이에 따른 신어와 의미 변화, 외래어 수용 태도 및 순화어 등에서 두드러진다. 이러한 면 외에도 '상평(하다)'와 같은 어휘의 발생 및 쓰임은 남북의 언어 차이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함을 시사해 주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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