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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mbling

보루와 막대기

editor752 2019. 11. 10. 16:21

흡연자가 줄어드는 지금, 담배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자니 철 지난 해변가에 낡은 튜브 들고 들어서는 기분이다. 그래도 북한의 어휘 쓰임과 관련이 있으니 나름 재밌을지도 모르겠다.

남북에서 ’보루’가 단위성 의존명사로 쓰인다. ’자루’와 같이 이곳 저곳에 붙을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우직하니 오직 하나의 명사의 단위 명사로만 쓰이는데 바로 ‘담배’, 정확히 말해서는 궐련 담배갑을 세는 단위 명사이다. 아래는 《표준국어대사전》의 <보루> 뜻풀이다.

보루3(bôru)「의존 명사」

담배를 묶어 세는 단위. 한 보루는 담배 열 갑을 이른다.

  • 담배 다섯보루.
    어원·<board

그런데 몇 개를 한 보루로 하는지 남북에서 차이가 있다. 남에서는 10갑을 묶어 한 보루로 센다. 그런데 북한의 대사전 《조선말대사전》에서는 보통 30갑을 한 보루로 하고 특수한 담배의 경우에는 10갑을 한 보루로 센다고 한다. 그런데 정말 30갑이 한 보루인 담배가 있는 것일까? 내 경험상으로는 없었다. 평양과 금강산에서 북한 담배를 구입한 적이 있는데, 한 보루에 30갑이 들어있던 담배는 없었다. 대개는 10갑이 한 보루였다. 혹시 내가 산 담배들이 모두 특수한 혹은 고급 담배였던 것일까?

물론 그때는 흡연자였고 나름 애연가였던 터라 북한 담배를 종류별로 알뜰하게 맛을 봤다. 말이 샌 김에 북한 담배의 종류를 나열해 보자. 아침, 강선, 려명, 광명, 룡봉, 압록강 … 최근에는 김정은이 즐겨 피운다는 7.27 등이 있다. 대개 남한의 담배보다는 니코틴, 타르 등의 함량이 높은 독한 담배였다. 순한 담배를 즐기는 사람에게는 북한 담배는 고역이 될 수도 있겠다.

참, ’보루’의 어원은 영어 보드(board)다. 영어 단어가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에 정착한 말이다. 요즘과 같이 원어의 발음에 능숙한 화자들로서는 board와 '보루' 간의 음상의 차이가 비슷함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현격할지 모르겠다. 납득이 되지 않더라도 일본식 영어 발음이 수입되었다는 점에서 좀 정상참작을 해 주길 바란다. 일본은 컵(cup)이 고뿌(コップ)가 되니 말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근대에는 이 '고뿌'가 널리 쓰였다.[각주:1]

내친 김에 더 안드로메다로 기수를 잡아보면 북한 담배 중에 ’강선’이라고 있다. 북측 인사들과 함께 담배를 피우면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이 담배 이름에 대해서까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이 담배의 주인이 ’강선 제철소’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주장을 폈는데, 다른 분은 ’강림한 선녀’라는 의미로 각 어절의 첫음을 따온 거라는 주장을 하셨다. 어느 쪽이 정확한 것인지는 지금까지 알 수 없다. 비록 지금은 비흡연자가 되었지만 이왕이면 담배연기가 제철소에서 쏟아내는 수증기가 아닌, 선녀가 출현할 때 그 신비로움을 더하는 연기에 비유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그렇다면 담배를 세는 말은 ’보루’뿐일까? 남에서는 다른 말이 없는 거 같은데 북에서는 ’막대기’가 쓰인다. 한 보루의 담배가 막대기처럼 보이기에 한 보루를 막대기에 비유하여 쓰던 것이 단어의 뜻으로 정착된 것이다. 《조선말대사전》에서 ’막대기’을 찾아보면, “가치담배 10곽으로 된 한 보루를 나타내는 이름수의 단위.”라는 뜻이 당당히도 올라와 있다.

일본식 ’보루’라는 표현이 슬슬 질리던 차인데 흡연자라면 이번 기회에 ’막대기’를 써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1. 우리나라에서는 비규범어이지만 북에서는 지금도 규범어로 쓰이고 있는 단어이다. 북한도 예전과 같이 언어 순화 정책에 집착하지 않고 있으며 국제적 접촉이 이전보다는 일반에 확대되고 있는 상황이라 이런 어휘의 수명도 길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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